금요일, 4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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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월 30

역싸 투

기존에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다시 말해 역사주의적 관점은 역사를 하나의 연속적 흐름으로 파악했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가 축적되는 것으로, 시간상 후대에 해당하는 역사가 그 앞 시대보다 진보한 것으로 바라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류의 기술과 지식이 진보하며 그 자체가 인류의 진보를 의미한다고 보는 이러한 관점은 “역사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관통하여 진행해 나간다는 생각과 분리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역사주의적 방법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 급급하다. 유물론적 역사 서술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구성의 원칙에 근거를 둔다. 사유에는 생각들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들을 모으는 역사주의에는 반성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에 현재를 덧붙인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벤야민이 바라보기에 역사는 언제나 직선 혹은 나선형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지 않았다. 역사는 일시적으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연속적인 흐름을 갖지 않고, 따라서 균질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역사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 중에서 이를테면 전쟁이나 혁명 같은 것이 세상을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 역사주의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침략과 지배의 결과인 ‘문명’에 대한 해석이 단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입장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지배에 저항하고 새로운 삶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성취했던 저 ‘비상사태’들의 가치를 그 이전의 역사나 그 이후의 역사와 동질적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점을 역사주의는 모른다. 이런 까닭에 벤야민은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직하는 것”을 역사적 유물론자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에게 ‘역사’는 왜 중요했을까? 그는 왜 전쟁과 파시즘의 위험을 감수하며 파리의 도서관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을까? 그에게 역사는 단순히 인류의 과거 이상이다. 그는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는 것, 즉 현재 상태의 근거가 되는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각성’을 꾀한다. 마치 프루스트가 홍차와 마들렌, 포석의 모퉁이에 걸린 발의 감각에 힘입어 우연히 과거의 이미지들과 만나고 그것을 통해 작가로서 자기 임무를 각성하게 되었듯, 벤야민은 흐름 속에서 떼어낸 역사의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 현재 상태를 예외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각성하는 역사의 주체들을 호명하게 되었다. 그에게 역사란,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밑불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막 덮쳐오는 불행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준비된 것인가 - 이를 동시대인들에게 알리는 것이야말로 역사가가 진정 바라는 바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를 인식하는 순간 동시대인들은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한층 더 잘 알게 된다. 그에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주는 역사는 그를 슬프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하게 만든다.”

목요일, 1월 22

역싸



 벤야민이 프루스트에게서 배운 바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기억’을 펼쳐내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벤야민은 프루스트가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삶이 아니라 삶을 체험했던 사람이 바로 그 삶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삶을 기술”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프루스트가 자신이 체험했던 내용이 아니라 그 “체험의 기억을 짜는 일, 다시 말해 회상하는 일”에 몰두했고, “기억이 씨줄이고 망각이 날줄이 되고 있는 무의지적 회상에 기대 글을 썼다는 의미이다.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 불러내기 위해 이성과 의지의 작용이 필요하다면, 무의지적 기억 혹은 무의지적 회상은 그 반대이다. 그 때문에 벤야민은 프루스트의 ‘무의지적 기억’이 오히려 망각에 가깝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밤이 짰던 것을 낮이 풀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우리는 대부분 약하고 느슨한 몇몇의 조각 속에서 망각이 우리들 속에서 짰던 이미 체험한 삶의 양탄자를 갖게 된다. 그러나 낮이 시작되면 우리는 언제나 목적과 결부된 행동을 하게 되고 또 그 위에 목적에 맞게 기억을 하게 됨으로써 망각이 밤새 짰던 직물과 장식은 해체된다. -프루스트의 이미지, p103

 회상에 있어 콩브레는 마치 얇은 한 개의 계단으로 이어진 2층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콩브레에는 마치 저녁 7시 시각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묻는 이가 있다면, 콩브레에는 다른 것도 다른 시간도 있었다고 나는 대답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것은 단지 의지에 의한, 의지의 기억에 의해 회상되는 것이며, 그 기억이 주는 정보는 참된 과거를 무엇 하나 간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의지해 콩브레의 그 밖의 것을 생각하고 싶은 마음을 결코 갖지 않았으리라.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p64-65

저번에 그 책, 기억의 발견 : 프루스트로부터 중





 벤야민이 ‘깨어나는 것’, 즉 각성을 역사 서술의 핵심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는 억압과 불편으로부터 벗어나 더 나은 삶을 향한, 각성한 인류의 활동으로 만들어져왔다는 생각이 그의 역사 인식에 핵심적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한두명의 영웅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명령에 따라서 만들어져온 것이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가 처한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비마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다.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축적물이 아니며, 그것을 통해 지금-여기에 펼쳐지는 삶의 진면목을 발견할 때 의미가 있다. 벤야민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잠에서 깨어나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 추적하고자 했다. 그에게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의 삶, 즉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하는 것으로서 혁명은 각성된 인간과 투쟁하는 피지배계급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역사를 바라보는 유의미한 틀로써 프루스트를 염두에 둔 것은 역사를 연속성의 관점에서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일반적인 역사가들의 방식에 반대하며, 역사를 통해 현재를 풍부하게 인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휙 지나간다.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 과거를 고정된 사실로 인식하고 시간의 연속 과정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이미지’로 인식한다는 것은 역사를 “구성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며, 이때 역사가 구성되는 장소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시간(Jetztzeit)으로 충만된 시간"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벤야민이 볼 때,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축적된 과거의 사실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으로 지금-여기의 삶에 간섭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그 ‘휙 지나가는 이미지’의 과거를 붙잡아 정지시키는 방법을 벤야민에게 알려주었다. 그것은 이지적 노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무의지적이고 우연한 사건과도 같이 불쑥 떠오르는 기억을 이미지의 형태로 아주 순간에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시간의 연속으로부터 탈락된 파편적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저번에 그 책, 역사, 과거의 이미지들 중






화요일, 1월 20

뜨거운 책의 뜨거운 글들






 정서적 연결은 커다란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관객들을 활동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바로 이 정서적 연결이 관객들을 삶의 인식과정에 참여시킨다. 왜냐하면 정서적 연결은 주제로부터 미리 짜여진 결론 도출에 의존하거나, 작가의 경직된 지시에 의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묘사된 현상의 더 깊은 의미를 감지하도록 도와주는 것들은 자유롭게 관객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복잡한 생각이나 서정적인 세계관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지나치게 분명하고 공공연한 틀 속에 짜맞추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직접적이고 일반적이며 진부한 결론 도출의 논리는 기하학적 공식의 증명을 연상시키는 쓸데없는 의심을 살 뿐이다. 이에 반해서 예술에 있어서는 삶의 이성적, 감정적 평가들이 서로 결합되는 연상적 연결들이 의심할  바 없이 훨씬 더 풍족한 가능성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 가능성을 그렇게 드물게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길을 택하는 것이 종래의 전통적인 방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약속해 주기 때문이다. 정서적 연결이야말로 영상을 빚어내는 원료들이 그 찬란한 제 빛을 낼 수 있게 하는 내적인 힘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한 대사에 관해 동시에 모든 것이 말해지지 않는다면, 무언가 덧붙여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덧붙여지지 않는다면, 결론은 관객들에게 모든 사고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대두되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이 경우, 결론을 아무런 고민 없이 제공받기 때문에 관객은 이 결론을 가지고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게 된다. 작가가 관객과 함께 한 장면을 창조하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즐거움을 나눠 갖지 않는다면, 작가가 과연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중 시작 부분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삶의 본질과 자기 자신, 자신의 가능성과 목적을, 그때마다 새롭게 인식한다.  그런 인식 과정에서 인간은 기존에 축적된 지식을 총체적으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도덕적 자기 인식이라는 것은, 매번 새롭게 겪어야만 하는 그때그때의 경험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이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되며, 이 세계를 획득하려는 고통스런 요구에 내몰린 채, 자신이 직관적으로 감지한 이상과 이 세계를 조화시키고자 애쓴다. 이 채워질 수 없는 요구야말로 인간적 불만과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고통의 영원한 원천인 것이다.

...

 예술이 태어나고 발전되는 곳은 다름아닌 정신적인 것과 이상을 향한 저 영원하고 쉴새 없는 동경이 가득 찬 곳이며, 에술의 주변으로 인간들이 모이도록 만드는 곳이다. 단지 독자성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의미를 찾는 맹세를 파기한 현대 예술이 제시한 길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창조적 행위라는 것은 단지 그들의 자기 중심적인 행위의 일회적인 가치의 정당성만을 추구하는 기이한 사람들의 이상한 짓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는 개성이 진실임을 판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좀더 보편적이고 좀더 높은 이념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예술가란 자기 자신에게 마치 기적과 같이 부여된 재능에 대해 소위 관세를 물어야만 하는 하인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오로지 희생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점을 점점 망각하고 따라서 우리들의 인간적인 결정을 위한 감정조차도 잃어버린다.

같은 책,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서의 예술 부분







월요일, 1월 19

앎과 실천의 문제

오늘의 한국아동문학에서 작가와 평론가와의 관계

작가는 평론가들이 (문학이론가나 비평가, 연구가를 모두 묶어서 평론가로 말함) 자신보다 문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하여 부러워하거나 움츠려들 필요는 없다. 문예에서는 창작이 먼저요, 평론가들은 독자들(작가들도 포함한)을 위해 작품을 연구 ․ 분석 ․ 비평해 보이는 일을 할 뿐이다.
작가가 없다면 그들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작가가 할 일은 평론가에게 뒤지지 않도록 문학사나 문학이론 연구에 골똘하기보다는, 폭넓은 독서를 통하여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과 사고의 지평을 확대하고, 창작의 원천인 체험을 넓혀 가면서 좋은 작품 쓰기에 열중하는 일이다.
아동문학평론가들이 아동문학사나 지나간 시대의 작가 작품에 대한 연구와 문학이론에 해박하다 해도 결코 작가를 앞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라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그들이 아니라 자신보다 우수한 작품을 쓰는 동료 작가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뒤바뀌어 평론가들이 작가를 자기 멋대로 요리할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하고 설치는(?) 바람에 작가들이 그들의 위세에 눌려, 두려워해야 할 존재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작가 자신 때문이다. 작가들의 정신(작품)이 그들을 압도하면 설령 그들이 제 아무리 빼어난 이론이나 연구로 완전 무장하였다 하더라도 작가를 함부로 깔고 뭉개려 들지는 못할 것이다.
평론가들은 작가가 탄생시킨 작품을 통해서만이 자신들의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2차 라인 생산자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비평이라는 칼을 갖고 있다고 하여 작가를 함부로 위협할 수는 없다. 겁 많은 작가나 작가 그룹에 입문한지 얼마 안되는 신인 작가들이라면 위협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 평론가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이들이다. 이런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회심의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자신들이 작가들을 웃고 울리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작가가 먼저다. 작가가 언제나 선두에 서고 평론가들은 작가의 뒤를 따라 다니며 작가가 노래하고 흥얼대는 이야기를 기록, 분석, 비평할 뿐이다. 막말로 말하면 작가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직무에 충실할 때 존재 가치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유일한 무기인 비평이란 칼은 작가가 손으로 만든 물건을 통해서만 (자신들은 직접 물건을 못 만드는 존재다)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칼을 조심해야 한다. 칼에 베이면 크게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특히 정신이 멍청하거나 만든 물건이 날림으로 보일 땐 영락없이 그들의 먹이 감이 된다. 그런 먹이 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기세등등하여 자신들이 문학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려 든다. 그러나 빼어난 물건을 만나면 그 물건을 만든 이에게 침이 마르도록 온갖 찬사를 바쳐야하는 한 사람의 찬사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정말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빼어난 창작에 예리한 비평, 해박한 지식을 함께 갖춘 평론가들이다. 이런 이들을 세계문학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평론가를 자신의 아랫사람처럼 대수롭잖게 여기느냐 아니면 상전처럼 여기느냐는 오로지 작가에게 달려 있다. 현재 한국아동문단에서는 평론가가 작가의 상전 노릇을 하려 하고 있다. 이는 작가들 탓이다. 작가들이여, 좋은 작품을 써서 아동문학평론가들을 아랫사람처럼 부리자!
―내가 평론가라는 이들을 너무 비아냥거렸나! 나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를 두려워한다.

(9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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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삼 아동문학 사랑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