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1월 5

이미지

요컨대 내가 바라는 것은 상황과 나이에 따라 변하는 수많은 사진들 사이에서 유동적이고 흔들리는 내 이미지가 나의 '자아'(주지하다시피 심층적인 자아)와  항상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아'는 나의 이미지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겁고 부동하며 집요한 것은 이미지이고(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이 이미지에 의지한다.) 가볍고 분열되어 있으며 분산된 것은 '자아'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실험용 잠수 인형처럼 나의 병 속에서 나를 흥분시키면서 잠자코 있지않는다. 아, 최소한 사진이 나에게 중립적이고 해부학적인 육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그런 육체를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잘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는 사진은 유감스럽게도 나로 하여금 항상 어떤 표정을 지니고 있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나의 육체는 그것의 영도를 결코 만나지 못하며, 아무도 이 육체에  그것을 주지 못한다.

                                                                           Roland Barthes, Camera Luci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