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2월 10

오후 8시 1분 전의 칸트

 칸트는 미적 판단의 보편성을 주장하기 위해, 미적 판단과 관련된 즐거움의 공유 가능성에 의지한다. 개념화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판단이 좌절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를 의미한다. 미적 즐거움의 본질은 지성에 도달하지 못한 채 상상력에서 지성으로 끊임 없이 나아가려는 시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는 "능력의 활성화"로부터 나오는 즐거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상상력은 지성에게 개념화를 위한 후보인 그러한 미감적 통일을 넘겨주지만, 이를 위해 지성이 아무리 많은 개념을 제공한다 할지라도 어떠한 개념도 충분할 수 없다. 하지만 적절한 개념을 찾으려는 시도는 포기될 수 없으며 항상 새로운 개념적 제안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은 원칙적으로 끝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만족스런 결론이 내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적 즐거움은 항상 스스로를 혁신한다. 우리는 친숙한 그림을 보거나 동일한 교향곡을 듣더라도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나중에 참고하기 위한 하나의 개념하에 집어넣음으로써 이러한 미적 즐거움의 원천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카이 함머마이스터, 독일 미학 전통.



- 지난 학기 수업 내내 강사분의 말이 불편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그녀는 항상 '문제의식'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있었다. 종종 칸트나 키에르케고르를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녀가 좋아하는 칸트에 따르자면(좋아하는지 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어느 날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있다고 님들도 이런 걸 읽으라며 계몽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그마저도 발췌요약본) 그녀는 칸트가 제시한 그대로의 시각으로 예술을 대하는 것 같다. (영감을 주는 듯한 존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발이 빠져버린 대표적 상황) 자유미보다 부수미를 높은 위치에 올려둔 채, 작업의 동기가 결과와 무결 일치하길 바랐고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 '문제의식'이길 바랐다. 당시에는 이것이 정치성이나 사회성을 내포한 것인지 헷갈려 질문을 하려했던 적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것보다는 좀 더 궁극적인 것을 의미하는 뉘앙스로 느껴져 질문은 관뒀다. 아니 수업을 안나가서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찌됐건 그녀는 합목적적인 예술을 실천하길 강요했고, 그녀의 칸트만큼이나 경직된 사고 속에서 나는 버텨내지 못했다. 목적에 의존하는 예술. 그 자신도 그렇게 하고있기에 내게 그녀의 작품은 별 매력이 없다. 아 한가지 덧붙이자면, 칸트에게서 예술인 것은 모두 아름다워야 한다. 추한 예술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의 시각으로 미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녀의 계몽연설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조회시간보다도 무가치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이 그렇게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떨칠 수 없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