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 함머마이스터, 독일 미학 전통.
- 지난 학기 수업 내내 강사분의 말이 불편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그녀는 항상 '문제의식'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있었다. 종종 칸트나 키에르케고르를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녀가 좋아하는 칸트에 따르자면(좋아하는지 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어느 날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있다고 님들도 이런 걸 읽으라며 계몽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그마저도 발췌요약본) 그녀는 칸트가 제시한 그대로의 시각으로 예술을 대하는 것 같다. (영감을 주는 듯한 존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발이 빠져버린 대표적 상황) 자유미보다 부수미를 높은 위치에 올려둔 채, 작업의 동기가 결과와 무결 일치하길 바랐고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 '문제의식'이길 바랐다. 당시에는 이것이 정치성이나 사회성을 내포한 것인지 헷갈려 질문을 하려했던 적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것보다는 좀 더 궁극적인 것을 의미하는 뉘앙스로 느껴져 질문은 관뒀다. 아니 수업을 안나가서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찌됐건 그녀는 합목적적인 예술을 실천하길 강요했고, 그녀의 칸트만큼이나 경직된 사고 속에서 나는 버텨내지 못했다. 목적에 의존하는 예술. 그 자신도 그렇게 하고있기에 내게 그녀의 작품은 별 매력이 없다. 아 한가지 덧붙이자면, 칸트에게서 예술인 것은 모두 아름다워야 한다. 추한 예술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의 시각으로 미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녀의 계몽연설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조회시간보다도 무가치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이 그렇게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떨칠 수 없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