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낸 학기는 아니었다. 군더더기 없이 해야하는만큼만 했는데 부산물들이 널부러져있었다. 마음같아선 콘크리트에 해머드릴을 박듯이 보러온 사람들에게 내 모든 찌끄레기들을 박아넣어버리고 싶었다만, 그리 하지않은 것이 실로 다행스럽다.
그 동안 크리틱(내지는 수업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마음 깊은 곳에 응어리져있던 상태였다. 무엇을 걸어놔도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실제 상황, 그러니까 '진짜 관객'을 대면시켰을 때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30분만에 그린 그림을 보고 누군가는 기쁨을 느끼고 누군가는 슬픔을 느끼며 누군가는 지루함을 느낀다. 무엇이 남아있을지 상상해볼 수 없었다. 나완 스타일이 달라 큰 기대를 하지않았던 써니킴선생님이지만, 결국엔 내게 많은 힘을 주셨다. 인용하자면 "-씨는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attitude가 있어요. 그 특유의 angle을 살려서 계속해서 보여주세요." 내 애티튜드? 앵글? 있는 듯 없는 듯하다고? 어릴 적엔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이 굉장한 도덕적 결례라고 생각했다. 자라온 동네의 분위기가 모 아니면 도 스러운 '털난 남성상'을 받들기도 했고. 마지막 직전의 시간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백을 해버렸다. 며칠의 밤샘으로 피곤함이 필터링을 거부했는지 나도 모를 소릴 많이 지껄였다. 정말로 크리틱이라는 것은 정신분석과도 비슷한 순간이다. 나의 상황을 보여주면 관객들은 그것들을 자기 거울로 비춰본다. 그들의 거울은 다들 다른 도드라짐이 있어, 결국엔 지들맘대로 보인다. 그걸로 나는 나를 다시 본다.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조금씩 알 수도 있지않나 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녀는 정말 현명하다. 학기초에 화풍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곤했는데, 이제 그건 어떻게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과제는 전에 내가 만든 이전 작업의 무게에 짓눌려 진행을 제대로 못하고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계속해보라며 intution을 격려했다.(자꾸 영어로 쓰는건 그녀의 말의 분위기를 되새김질중이기때문이다.) 결국엔 선생님의 가벼운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게 진짜로 괜찮은 것인지, 오리무중의 상황에서 제 갈길을 찾아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언젠가 주위에 아무도 내 작업에 대해 말해 줄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굉장히 외로울 것 같다. 그리고 힘들 것 같다. 또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수년내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기억하자. 내 시간은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