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2월 2

"사는기 그럿늬라-"




 산소에 가면서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가족사를 들었다. 뿌리를 알아가는 본능적인 즐거움인 건지 비극 뿐인 와중에도 더 궁금해하는 내 모습이 흥미로웠다. 외할머니는 본인의 반려자를 상실했다. 그리고 큰 딸, 두 아들의 반려자들 역시 상실했다. 철저하게 본래의 존재 그러니까 외할머니 본인의 씨앗들은 생을 유지해나가고 있는데, 외부에서 싹을 틔워준 존재들이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생의 비극성을 느끼게 한다. 외할머니는 본인과 아래 세대가 가진 불운과 불행을 이전 세대의 조상의 탓으로 일정 부분 돌린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본인의 상황에서 그러한 비극을 맞아야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며칠 동안 텅 빈 목구멍에 기름칠을 했을 그의 조상들은 어떤 기분으로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팔자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민은 편해진다. 누군가가 잘못을 해서 업을 짊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지금와서 지나간 실수들을 탓하고 슬퍼할 필요가 없어진다. 분명 그렇게 억지로 찬물을 들이키면 시간이 흐르고 또 내일의 생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외할머니는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로도 남부럽지않게 건강히 살아계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정신은 생에 대한 의지를 잃으셨다. 내가 가진 어떤 열정에 대한 회의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착같이 살아왔으나 만족과 행복이 어디에도 없다고 하신다. 종종 죽지 못해 산다라는 표현을 쓰신다. 그러한 삶을 영위하는 것은 본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절을 찾으신다. 아버지의 49제를 지낸 절을 학교가듯 아침마다 다니신다. 죽음이 귓속말을 하는 것인지 가끔 서서방있을 때가 좋았다며 맥없는 소릴 하시기도 한다. 있을 땐 그렇게 투닥거려놓고. 비극은 그 나름대로 나머지의 생에 양질의 거름이 되어준다. 시체 속에서 악취나는 내장을 뜯어먹고 불쑥 불쑥 자라나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예술을 한답시고 이 나일 먹도록 학생인 척하고 평온히 독서의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고, 외할머니의 큰 딸도 두 아들도 빈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를 얻는 것과 같다. 부재의 슬픔은 크나 그만한 공허의 땅을 가능성의 땅으로 치환해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그곳을 방치하고 몰려오는 죽음을 맞이하든, 악착같이 일궈내 무언가를 수확해내든 그것은 소유주의 몫이다. 나는 그 어떤 선택도 유보한 채 땅의 냄새를 맡고 있지만. 외할머니는 꽤 오래 땅을 일구셨다. 큰 딸이나 두 아들도 어찌할 수 없는 말년의 적막함을 맞으셨다. 적막함의 구름은 너무 짙은 어둠이라 여기서도 보인다. 아니 이미 날때부터 그러한 하늘을 보아왔기에 다른 색을 그려낼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공상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내 머리 위의 어둡고 적막한 하늘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부정하지 않을 이유를 만들고 있다. 저 위엔 무엇이 있을까? 외할머니가 물으셨었다. 천국이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내 기준에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않기에 천국은 신림동의 고시텔 건물처럼 작아빠져있지않을까 생각했다. 뭔진 몰라도 있을거라 대답했다. 내가 올라가면 아버지가 내게 토마스만을 소개시켜주면서 감자탕에 소주 한잔하자고 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 계속 엑셀을 밟았다. 열망에 찬 의지들을 무관심히 직관하는 눈이 룸미러에 비친 것 같다. 아마도 내 눈이리라 넘겨짚었으나 모두의 눈이기도 하다. 차안의 역사가 가진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