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2월 12

하루의 경계





 왜했고 왜했으며 왜했느냐. 

그림 앞에 서서 이게 나의 선생님이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눈알을 굴려봤으나 다른 구경꾼들은 별 관심이 없다. 나는 먹고 읽고 자는 시간 만큼 집중해서 응시했다. 가까이서 노려봤다가도 멀리서 게슴프레 쳐다보기도 했다. 이 사람을 알기 전에, 그러니까 약 1년 전 네오룩에서 보았던 그 이미지는 정말 아무 느낌이 없었다. 단지 소녀의 흔적이었다. 이번에도 여고생작업은 별로였다. 사람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어서 였을까? 윤수 아버지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아신다면 다르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예술은 없고 예술가만 남는 것이 아닌가? 사실 무엇이 선행하는 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눈 앞의 존재는 내팽개쳐 둔 뒤의 일일테니까. 현대의 회화에 정말로 리히터의 존재감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왜 리히터가 이 예술적 성취들을 갈취해 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재형과의 술자리에서 마를렌 뒤마와 모 선배(어리석게도 이름이 잘기억나지않는다. 학고재에서 전시했던 05학번 여자선배)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 그림자에 숨어있는 듯하다며 발목을 잡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정했으나 그렇게 말해야만 했을까 나는? 내가 베크만을 요새 좋아한다고 하고 그렸다고 하면 내 그림은 베크만의 그림이 되고 베이컨의 그림의 어떤 부분이 좋다고 하면 베이컨의 그림이 된다. 소화불량에 걸린 나를 직시하는 것인지 높은 그들의 아우라에 가려 눈 앞의 흔적을 볼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아직 알 길이 없다. 둘다에 해당한다고 나도 모르게 인정하고 있기에 계속 나를 다시 파내고 채운다. 그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내가 비정상적이지 않은( 혹은 생을 유지하려는) 하나의 유기체가 되는 길일 것이다. 

 몰락der untergang은 한 장면에 집약 되어있다. 
"당신은 왜 죽으려고 하십니까?"
"그러는 당신은 왜 살려고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