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책에 집중하는 것이 힘들었다. 오랜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피파를 쳐발리고 (자극을 얻고) 돼지찌개를 삼키며 이야기를 했다. 배 채우려 들어갔다가 문 닫을 때까지 앉아있다가 나왔다. 기준에 대해서, 가치에 대해서, 시선에 대해서, 권리에 대해서 한 번씩 젓가락 질을 했다. 종종 나의 학벌세탁에 대해 생각해본다. 좁은 구멍을 통과한 것이 내게 어떻게 도움이 되고 의미가 있을 것인지.
개인적인 비극성이 사회적인 비극성에 대한 관심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뜨거운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다가
개인적인 비극성을 해소하기 위해 개인의 반경 안에서 만족할만한 성공을 하기는 어렵다. 경험과 기억에 의해 비극의 안개 가까이에 있는 어떤 것이 무작위적으로(우리는 충분히 인지하고 논리적으로 왜 비난해야하는 지에 대해 알고있다고 믿는 마취의 상태에 있는 것) 장기적인 타겟이 된다. 그것을 평생의 좌표로 공격하고 찢고 물어뜯어 정복의 대상으로써 아이러니하게 생의 원천을 얻게 된다. 예술은 비극의 안개만큼이나 형태가 모호하므로 그 근처에 얼쩡거리다가 물어뜯기는 것이 보통이다. (대중예술은 그것의 피부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매우 두꺼운 피부층을 갖고있으므로 우리는 껍데기만 질겅질겅 뜯으면서 예술을 즐긴다 믿을 수 있고, 정작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와 감동을 주지못한다. 단지 겉맛일 뿐. 골수까지 빼먹으려면 숙성시키고 오랫동안 입에 넣고 녹일줄도 알아야할 것이다. 어찌 달콤한 것에 길들여진 입으로 과메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는가?) 적당한 물어뜯을 대상이 없는 경우에 우리는 눈을 돌리게 된다. 내 눈앞에만 있는 줄 알았던 비극의 안개가 정작 머리위에 비극의 구름이라는 존재로 보이게 된다. 이것은 사회성을 포함한 비극으로 굉-장-히 장기적인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개체가 삶을 끝마칠 때까지 덤벼도 절대 숨통을 끊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어둠 .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지나도 삶에 이유를 찾게되는 것이고, 그것에 참여하고 사유하면서 개인적인 비극에 대한 치유(혹은 그에 대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안정감)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트의 정식분석이론에 있는 지형성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나도 모르게 비유와 은유로 감정과 사상의 지도를 구성하는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최근 지니어스라는 프로그램을 재밌게 보고 있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한 편씩 보곤 한다. 시즌1은 아직 보지 못했는데 요새 네티즌들 사이에선 현재 시즌2의 진행방식에 대해 논란이 많은 가 보다. 본인이 별로 논리적이지 못한 건지 아직까진 문제의식을 그리 못느끼기도 하고...... . 마침 자주 들어가는 축덕 커뮤니티에서 파벌 논쟁에 대해 이야기가 나온다. sns들로 오해와 비난이 겹쳐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들은 이미 갈라섰다. 우리는 편을 가른다. 본능적인 행위인 것일까? 프로그램 나레이션으로 나왔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배신을 하는 것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신뢰를 주는 행위라고 한다. 나는 내 주변 그 어떤 곳에도 신뢰도 배신도 주고싶지 않다. 깊게 엮이는 것이 귀찮은 걸까 종종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그 어떤 배신도 하기싫음에 연유하는 것 같다. 절대적인 것과 영원함의 불신이 내게 아예 멀리 가버리라고 한다. 차라리 그게 더 낫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