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9월 2

식어빠진 청춘

배우 김성균 씨는 이렇게 말했다. "땅끝에 도착하면 금은보화라도 있을 줄 알았다."

잠깐의 여백을 거친 후, 담담한 하정우의 나레이션이 그곳엔 환영해주는 사람도, 금메달도 없었다. 단지 우리가 있었을 뿐이다라며 정리를 하며 영화는 곧 끝이 난다. 중후반부 쯤 이런 장면도 나온다. 열심히 걷는 와중에 하정우가 "출발했을 때랑 뭔가 많이 달라져있을 줄 알았는데 똑같네요." 하며 너스레를 떤다. 영화 내에서 감지할 수 있는 그의 성격상 괜히 흘린 말일 수도 있겠지만 정확했다. 그게 내가 얻은 것이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요즈음의 나는 굉장히 담백하다. 아니 건조하다라는 말이 더 맞겠다. 내가 일말의 불편함을 느낄 정도는 되니까. 사실 이런 감정을 느낀 지는 꽤 되었다. 수년 전부터 각종 sns에다 음악이 귀에 안꽂힌다 따위의 잡담을 배설해냈으니까. 이 이야기를 하는 상황자체도 내겐 지루하다 싶을정도이다. 어디선가 많이 써먹었다. 뭔가 글이라고 하기도 어설픈 어떤 것들을   감상을 했기 때문이아니라, 하고싶어서 써댔다. 그때까지는 그저 지나가는 삶의 권태같은 것이려니 했는데 한창 부글부글끓어야할 이십대를 그냥 멀뚱멀뚱한 채 지하철 놓치듯 보내버릴까봐 가끔은 겁이 났나보다. 글쎄 무엇을 먼저 이야기해야할까..

보통 리니지류의 rpg게임을 하면 몹을 잡고 레벨을 올려야한다. 고렙이 되어서 국보급 아이템을 장착할 때 누리는 기쁨은 굉장하다. 그에 따른 보상인 것이다. 존나 힘들게 밤새가면서 지루함과 싸워 혼자서 이룬 업적. 그 후에 남겨진 허무함은 별개로 치더라도. 그것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학문에서 뜻을 이루기 위해선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앉아 책을 쓰고 글을 써야 하며, 스포츠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 뼈를 깎는 고통을 훈련으로 덮어 기록을 세운다.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흘리는 눈물은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보며 주체할 수 없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던 내게 그 과정은 굉장히 단순하고 합리적인 것이었다. 고품질의 땔감인 청춘을 부어넣어 땀흘려 펌프질만하면 기관차가 어디론가 당도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사 결론을 내리는 것이긴 하지만, 그때 그 가연성이 높은 나의 청춘은 생채기 가득한 열여덟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나날들이었으니까. 사람의 마음에도 일종의 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요새의 나는 그시절의 반작용이라고 생각하기도한다. 다 써버린 감정들을 다시 채워놓으려는 균형을 위해서

잠깐 새버렸는데 다시 고속도로로 올리자면, 그 단순한 렙업행위의 명료함이 요새 꽤 불투명해진 것 같다는 말이다. 나역시 땅끝에 가면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을 줄 알았다. 아니 그냥 경치라도 좋을 줄 알았다. 절경은 아니더라도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두고 땅의 '끄트머리'에 서서 '내가 여기 왔구나!' 라는 의미있는 마무리는 하게될 줄 알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왠걸, 거기선 아무것도 보이지않았다. 경포대같은데 있는 길다란 방파제(왠지 그런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끝이니까!)따위는 대체 어디숨어있는지 요상한 산길로 올라가라고 표지판들이 우릴 부추겼다. 땅끝을 보러왔는데 왠 산이야? 간혹 나뭇잎 사이로 스쳐지나가는 가까운 회색을 보며 저것이 우리가 보러온 바다는 아니겠지 하며 자위했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우린 가까운   항도 보이질 않는, 바다와 하늘이 구분도 안가는 평면적으로 보이기까지하는 그런 회색빛을 보고야 말았다. 그것이 우리가 걸어온 목적이었던 것이다. 탄식을 기어이 숨기고 웃으며 셀카를 찍었었다. 그게 그때는 필요했다. 하지만 무언가 열과 성을 다해 해놓은 것이 단지 회색빛 하늘인 것은 내 계산에서는 굉장히 비논리적인 일이었다. 아마도 그 무거운 바닷바람에 가슴이 굳어버린 것 같다. 2년간 억누른 내가 힘없이 밖으로 새어나왔다. 억압의 역사가 끝나고 종결의 의미를 가진 여행이었기에 실망도 그 만치 컸다. 그후 나는 복학생이 되었고, 고시텔-학교-도서관의 패러다임 속으로 빠져들었다. 숨막힐 것같았던 복학생활은 다른의미로 내 숨을 불편케 했다. 안락함 속에서 숨이 막혀왔다. 거대한 축사안의 병아리에겐 단지 물과 사료만이 필요하다. 죽어나가는 놈은 제가 불행하고 못난 것이고, 살아남는 놈은 단지 잘게 분해되서 마트에 걸릴 뿐이다. 축사를 뛰쳐나오는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지않았다. 결과론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또다른 회의를 갖는다. 진정하게 가치를 보고 날 살려둔 것인지, 아니면 있어보여서(쓸만해 보여서, 단지 보여서) 살려둔 것인지는 내가 보여줄 문제겠지만...

문득 과 카톡방과 고등학교동창 카톡방에서 느껴지는 괴리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를 가늠해본다. 그 어느 쪽에도 가깝지않은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친구들쪽이 그나마 나와 비슷한걸 알면서 안심이 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억지로 현명해지는 과정이라고 스스로 결정내렸다.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이고, 꼭 해도 하지않아도 별로 나쁘지 않게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되는 과정. 나는 지금 그 과정 속에 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