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6월 12
촌스러운 사람, 촌스러운 그림
작가는 그림으로 말한다는 철칙을 어기고 부끄럽게 이 글을 쓴다. 전시회를 마련해 놓고 마땅히 누구에게 글을 부탁할 주변 형편이 못 되는 데다가 마침 카다록 레이아웃 담당자의 전문적 충고를 뿌리치지 못하고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나는 본래가 촌스러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육, 칠년 전이던가 스러져 가는 정신을 추스르고 그림판에 뛰어 들었을 때 나름대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던 기억이 있다. 그 용기란 것도 막스럽기 짝이 없는 촌스런 용기였다. 현실의 앞뒤를 재지 못하고 의욕과 막연한 희망만을 쫓아서 나온 꼴이었다. 나에게 걸맞지 않은 아둔함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격이나 행동의 촌스러움 뿐만 아니라 풍겨지는 인상도 촌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생김새에, 약간 길쭉한 얼굴형을 제외하고는, 조형적인 비대칭이나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중간한 촌스러움이 진하게 베어 있는 것 같다. 나름대로 모양을 내보기도 하지만 내 자신은 부정할 수 없는 촌티를 내 얼굴에서 읽는다. 한마디로 외모나 행동, 정신에서까지도 촌티를 내는 그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구조적으로 촌놈이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그런 나를 두려워 한 적도 있고 일견 부정적인 면이 있음을 인정해 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촌스럼에 새롭게 눈을 뜨면서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바탕 정신을 지탱해 주는 것도 그것이요 진실에의 접근이나 작품 제작에 있어서도 그것이 거의 본질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촌스러움은 촌스러움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자각이다.
내친 김에, 이야기가 다소 산만해 질 수 있지만 촌스런 얘기를 계속 해 보기로 하자. 촌은 곧 시골, 농촌이다. 촌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都)나 읍(邑)에 반해서 한적한 들이나 교외다, 즉 야(野)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촌 즉, 야는 문화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 된다. 인류역사에 대한 해석은 여러 관점에서 방대하게 시도되고 있지만 함석헌 선생은 이를 문(文)과 야(野)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문은 글이요, 야는 바탕 즉, 정신이다. 글은 무늬요(文의 문 자적 원형은 무늬이다) 바탕은 말 그대로 무늬 이 전의 본 바탕이다. 여기에서 야는 공간적 개념을 넘어선 정신적 영역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흐름은 문과 야의 문답이요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깊은 통찰속에서 건져낸 진실임에 틀림없다. 문명은 괴물과 같다. 문명은 한편으로 세계를 발전시키지만 자체의 필연적 원인으로 다시 쇠퇴하곤 한다. 그것은 문명의 독으로 인하여 정신이 약해지는데 있다. 바로 이럴 때면 더러워진 바탕을 바로 잡기 위해 뜻있는 야인(들사람, 촌사람)들이 나타나서 백성을 깨우기 위해 부르짖는다고 한다. 야성 그 촌스러움이 세상을 구하고 역사를 도약시킨다는 것이다. 옳은 얘기다. 그렇다면 공자도 노자도 예수도 소크라테스도 순수한 촌사람들이다.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의 격동속에서 스러져간 넋들, 민중의 함성도 촌사람의 그것이다. 촌사람은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직 얼의 소리를 듣는 사람, 썩어가는 정신에 생명을 지피려는 사람, 나약하고 교만한 이의 가슴을 꿰뚫어 버리는 매서운 눈매를 가진 사람, 풀잎 하나에도 감동하고, 외로운 달빛 아래서도 뜨거운 가슴을 풀어헤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촌 혹은, 촌사람의 본질은 정신이다. 쌀의 본질이 정신이듯이 촌의 본질은 정신이다. 도시에는 인간의 지혜와 힘이 있고 촌에는 자연의 힘과 지혜가 있으며 도시에는 교만과 꾀가 있으나 촌에는 겸손과 슬기가 있다. 도시는 꽃이요, 촌은 뿌리다. 촌의 바탕(野)이 정신이요 도시의 무늬(文)가 물질이라서 뿌리가 깊어야 나무가 무성해 지는 법이다. 한편 촌사람의 본질 역시 정신이라서 예리한 안목으로 맞서고, 거부하고, 창조하고, 진한 심정으로 박동치는 생명을 갖고 있는 이가 촌사람이다. 들판에 서 있다고 촌사람 일 수 없다. 그 생명이 있으면 누구나 촌사람이다. 정신 밖의 외부적 현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종속적이요 부수적인 것이다. 외부적 현실은 결코 완전한 참이 아니다. 씨는 언제나 보이지 않은 속에 있다. 씨는 피어서 잎과 꽃을 내지만 잎과 꽃이 씨가 품었던 전부가 아니다. 씨가 품은 것은 영원이요 무한이며 정신이다. 이 시대의 외부적 우리 형편은 무척이나 풍요롭다. 정치 경제적 상황들이 빠르게 개선되고 있고 모든 삶의 형태들-이 비교적 편하고 자유롭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그 이면을 보자. 얼빠지고 초라한 우리들의 자화상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발전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질 않다. 세기말의 혼돈과 맞물려서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고 있지 않나 하는 회의가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촌사람, 들사람의 정신이 필요하다. 사실 촌사람은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먼 미래에도 나타나서 뜻을 세울 것이다. 그들이 바로 역사의 주체자요 민족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다.
이제는 바야흐로 21세기라는 새 시대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가치있는 삶, 뜻이 있는 삶은 시대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 시대 읽기에 묘수를 찾지 못하고 한동안 고심한 적이 있다. 그것은 나의 얕은 지식과 흐린 정신으로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미로와 같은 것이다. "시대"라는 것이 갖고 있는 참된 의미는 삶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영과 육, 전체와 개체, 현실과 이상, 선과 악, 보편과 특수 등 여러가지 난해한 문제들과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난해한 "시대"라는 개념의 구조속에서 그 중심이 되는 핵심을 드러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민족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시대인식의 발전적인 의의는 그 민족정신을 통해 민족의 처녀성을 찾아내자는 것일 것이다. 시대를 헤쳐 읽으면서, 빼앗을 수도 없고 변하지도 않으며 결코 없어지지도 않는 민족의 처녀성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새로운 출발이다. 잘못된 역사를 뒤집어 헤치면서 그것을 차지할 수 있는 이는 역사의 주인인 바로 촌사람이다. 외로운 빈들에서 가슴을 풀어헤치고 홀로 풀잎노래를 부르면서 길을 가는 촌사람이 그립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밖에 없다. 나도 새시대를 준비하는 진정한 촌놈미술을 해보고 싶다. 이러한 바램은 나와 세계의 진실을 찾는 것이 뀔 것이다.
사실 나는 통속적 의미의 촌놈일 뿐이다. 그저 촌 놈 기질이 몸에 벤 사람이다. 진정으로 촌 스럽지 못함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제는 촌스런 그림을 그리는 촌스런 그림꾼이 되고 싶다.
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