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9월 8

Persona non grata

머리가 적당히 굵어질 무렵, 허허벌판에 서있는 전원아파트에서 벗어나 주거단지로 이사하게되었다. 그곳은 가운데 큰 차도를 경계로 좌우 사람들이 나뉘어있었다. 아직 몸에 털도 별로 없었던 나는 그게 뭔지 잘 몰랐으나, 은밀하게나마 어른들은 서로를 다른 곳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쪽은 주택공사에서 지은 주공아파트 한쪽은 당시 내로라하던 경북기반의 기업들이 모여 합작으로 지은 신축아파트 였다. 지금와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이 건축배경부터가 이야깃거리가 될 수 밖에 없지않나 싶다. 나는 신축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입주하기 전 을씨년스럽게 텅 빈 아파트 단지를 아버지와 함께 왔던 적이 있다. 역시나 희고 빈 방에서 닭발을 먹으며 아버진 무언가를 더듬어대며 방을 채워나가셨던 것 같다. 방엔 둘뿐이었지만 이내 꽉찬듯 했고 난 술은 안 마셨지만 곧 잠에 들었다.

내가 사는 동 뒤엔 야트막한 산이 있다. 산이라고 하기에 뭣한 크기지만 우린 그걸 그렇게 불렀다. 거기엔 샛길이 있었는데, 건넛동네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등산객도 있었고, 옆동네의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도 있었다. 어느 날, 엄마는 어디선가 들은 풍문을 들려주셨다. 산길에 껄렁패들이 있는데, 주공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그냥 보내주고 신축아파트에 산다고하면 뚜드려패고 돈을 뺐는다는 이야기였다. 잠깐 우습다가 무서워졌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저 길을 건너면 나는 돈을 뺏기게 될테니. 아직 알림장을 갖고 다니던 나이였지만 나의 신념에 대한 고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정체성을 속일 것인지. 만약 거짓말을 한다해도 그걸 구분해낼 건 뭐란 말인가? 예정된 비극은 굉장한 공포다. 불량학생은 어찌 생겼을까 궁금했다. 머리가 보라색일까? 아니 본드를 흡입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어쩌면 부모님들을 모두 여의거나 부자들에게 나쁜 기억이 있어서 그곳에서 복수의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건지도 몰라. 사자나 불곰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만 불량학생은 동물도감에도 티비에도 나온 적이 없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될때까지 그 형들이 착해져서 그 일을 그만두거나 다른데로 이사가길 바랬다.(그때까지 내가 먼저 이사갈 줄은 꿈도 꾸지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가물가물하다. 아이들과 삼국지역할놀이를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유비였고 귀갓길이면 위연과 제갈량을 데리고 함께 갔다. 보통은 위연이 우리에게 300원짜리 슬러쉬를 사주었다. 위연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유는 간혹 큰 덩치와 성격 탓에 친한 친구들과 트러블을 일으키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는데, 본인은 자기가 마초로 불리는 줄 알았다. 제갈량과는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바꾸며 그렇게 지냈다. 어느 날은 제갈량이 자기 아버지이야길 꺼냈다. 산을 넘다가 껄렁패들에게 몇대 맞으셨다는 이야기였다. 순간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물어볼 새가 없었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특별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제갈량의 아버지가 오랑캐들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것 자체가 빅뉴스였다. 수년이 지나고, 나는  질문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불량배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어디에 사는지 물어봤는지. 도깨비같은 그 불량배들의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두번째로는, 어른인 그의 아버지는 어떻게 대답했는 지이다. 거짓말을 하고도 당한 것인지 아니면  순순히 정체를 밝히고 달게 벌(?)을 받은 것인지. 2주전쯤에 그 동네를 다시 찾은 적이 있었다. 거품이 빠진 건지 상권이 인구도 많이 줄었다. 불량배들은 아직도 그 동네에 살고있을까? 아 신축아파트의 이름은 파크맨션이다. 파크맨션은 초록색, 하늘색, 분홍색이었고 주공아파트는 회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