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9월 29

상실에 다다라서야 개화하는 것

 어찌 이 모든 정신들을 서로 이어주는 깊은 혈연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특별하고 쓰라린 한 장소를 중심으로 다시 무리짓고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 장소에는 이젠 더 이상 희망 같은 것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얻어내거나 아니면 무(무) 둘 중의 하나를 원한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 터져나오는 절규 앞에서 이성은 무력하다. 이러한 요청에 못 이겨 이성은 잠깨어 일어나 찾아보지만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모순과 억설(억설)뿐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지닌 유일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이 세계는 엄청난 비합리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단 한번만이라도 '분명하게 알겠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구원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열망뿐인 사람들은,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고 모두가 혼돈이며, 인간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스스로의 명증성과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벽에 대한 명확한 인식뿐임을 공언한다.

 이런 모든 경험들은 서로 일치하며 겹친다. 궁극적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면 정신은 판단을 내리고 결론을 선택해야만 한다. 바로 여기가 자살과 대답이 자리잡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고찰의 순서를 뒤집어가지고 지적 모험에서 출발하여 일상적인 동작으로 되돌아오고자 한다. 여기 지적한 여러 경험들은 사막 속에서 태어난 것인 바 우리는 그 사막을 떠나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러한 경험들이 과연 어디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노력의 단계에서 인간은 비합리와 마주서게 된다. 그는 자신 속에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를 느낀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바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꼭 매달려야 한다. 한 일생의 모든 귀결이 송두리째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 인간의 열망, 그리고 양자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드라마지만 말이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