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1월 30

역싸 투

기존에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다시 말해 역사주의적 관점은 역사를 하나의 연속적 흐름으로 파악했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가 축적되는 것으로, 시간상 후대에 해당하는 역사가 그 앞 시대보다 진보한 것으로 바라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류의 기술과 지식이 진보하며 그 자체가 인류의 진보를 의미한다고 보는 이러한 관점은 “역사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관통하여 진행해 나간다는 생각과 분리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역사주의적 방법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 급급하다. 유물론적 역사 서술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구성의 원칙에 근거를 둔다. 사유에는 생각들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들을 모으는 역사주의에는 반성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에 현재를 덧붙인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벤야민이 바라보기에 역사는 언제나 직선 혹은 나선형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지 않았다. 역사는 일시적으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연속적인 흐름을 갖지 않고, 따라서 균질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역사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 중에서 이를테면 전쟁이나 혁명 같은 것이 세상을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 역사주의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침략과 지배의 결과인 ‘문명’에 대한 해석이 단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입장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지배에 저항하고 새로운 삶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성취했던 저 ‘비상사태’들의 가치를 그 이전의 역사나 그 이후의 역사와 동질적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점을 역사주의는 모른다. 이런 까닭에 벤야민은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직하는 것”을 역사적 유물론자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에게 ‘역사’는 왜 중요했을까? 그는 왜 전쟁과 파시즘의 위험을 감수하며 파리의 도서관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을까? 그에게 역사는 단순히 인류의 과거 이상이다. 그는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는 것, 즉 현재 상태의 근거가 되는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각성’을 꾀한다. 마치 프루스트가 홍차와 마들렌, 포석의 모퉁이에 걸린 발의 감각에 힘입어 우연히 과거의 이미지들과 만나고 그것을 통해 작가로서 자기 임무를 각성하게 되었듯, 벤야민은 흐름 속에서 떼어낸 역사의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 현재 상태를 예외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각성하는 역사의 주체들을 호명하게 되었다. 그에게 역사란,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밑불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막 덮쳐오는 불행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준비된 것인가 - 이를 동시대인들에게 알리는 것이야말로 역사가가 진정 바라는 바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를 인식하는 순간 동시대인들은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한층 더 잘 알게 된다. 그에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주는 역사는 그를 슬프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