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11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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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작품의 스타일들이 이토록 많은데도 정작 주체적인 미술의 담론을 위한 논의는 매우 부실하고, 미술 작품의 양식들이 다양하게 차용되고 있지만 정작 그 속에 숨겨진 idiom과 code의 문제들에는 무관심한, 실로 기괴한 미술문화를 양산해 왔다. 이 것은 미술과 담론의 가치에 대한 비판과 검증보다, 좋은 작품이라는 전근대적 평가에 의존된 가치와 위대한 작가로 대우받으려는 망상 같은, 표면적 성취에 매달려온 일련의 웃지 못할 풍경 연출의 원인이 되어 왔다. 이런 사정은 미술비평과 미술제도 전반을 뿌리 없는, 문화의 표면과 이면의 내용이 모순되고 미술의 현장과 제도가 부조리하게 어긋나며, 끝없이 서로를 소모시키는 비합리적 구조를 만들게 했다. 예컨대 수많은 자칭 미술평론가들과 학자들 그리고 미술관들과 큐레이터들, 저널리즘과 기자들, 화랑들이 버젓이 간판은 내어 걸고 있지만, 정작 현대미술의 담론과 그 가치를 감당해갈 역량도 의지도 없는 사람들 간의 동병상련의 심리와 이해관계에 따라 야합하여 뭉쳐진, 실로 개탄할만한 풍토를 만들고 있다. 병든 조막손 권력을 휘두르며, 남대문식 가짜 브랜드로서의 기이한 미술문화를 양산하는 이는 공통적으로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생각하는 일을 귀찮아하며, 따라서 당연히 논의와 논쟁이라는 토론문화를 기초로 하는 담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일정한 특징을 띤다. 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더듬이 문화'는 결국 현대적 자각의 뿌리가 없는 제도적 풍토를 만들어, 독버섯들과 해로운 곰팡이들에게 최상의 서식처를 제공해 온 것이다. 무수한 해외정보와 지식의 단편들이 오독과 오역의 위험을 안고 살포되고 있으나, 토론도 진지한 성찰도 없는 이런 문화적 풍토 속에서 정작 그러한 지식과 문화적 현상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며, 무엇 때문에 이런 문화를 공유해야 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일 자체가 요원해 보인다. 결국 첨단의 미술작품 양식을 일종의 유행성 트렌드로 인식하고, 그 스타일만 차용하여 소비함으로써 미술문화 자체를 끝도 없는 소모적 양상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글은 그저 읽는다고 지식으로 소화되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고 읽는 일은 공히 그 참 뜻을 어디까지 참조해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결정해 가는 판단의 문제이다. 그렇듯, 현대미술의 가치는 소위 작품의 스타일이 좋고 나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지닌 '지금 그리고 여기의' 담론적 가치에 있는 것이다. 결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가치는 '예술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성취인 것인가'라는 본질적 자문과 그에 관한 대응의 자답 형태로 주고받아지는 '담론'과 그 '문화'에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저드의 상자들이 청담동 어느 카페의 세련된 미니멀 분위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고, 자신의 작품이 인테리어 장식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오상길,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