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11월 15

본격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책 안읽고 쓰는 독후감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 다시, 그림이다.










본래 호크니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림을 굉장히 편하게 그리는 사람이라 느꼈고, 형태와 색채의 단순함이 무의식적으로 깊이가 결여되어있는 것이라고 잠정적인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마치 피터 도익의 그것과 비슷했다. 본인의 취향의 문제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혹은 그의 작업)에서 본인의 것과 의미있는 연결점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생각과 본인의 평소 회화에 대한 고민에 대한 공통점을 찾으려 노력했고, 그에 가까운 것을 소개하려 한다.


‘2차원의 평면은 2차원 안에서는 쉽게 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기는 힘듭니다. 그것은 많은 결정을 수반합니다. 3차원을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여야 합니다. 평면이 거기에 없는 것인 양 시도하고 가정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우리가 그림에 익숙해지는 법 그림을 해석하는 법을 학습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책의 극 초반부에 등장하는 회화를 향한, 더 넓게는 세계를 대하는 호크니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서 매우 큰 동질감을 느꼈다. 소위 입시미술로 불리는 ‘대상 재현하기'의 전형을 배운 적이 없어서일까? 나는 여태껏 어떤 것을 그려내는 데에 있어 거침이 없었다. 스스로는 그것이 ‘초심자의 행운(연금술사)’따위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누군가는 그것에서 원초적이고도 원시적인 강렬함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은 면으로 구성되어있지 선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고. 하지만 우리는 보통 무언가를 그릴 때 선으로 표현하곤 한다.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에 있어서는 선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선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대상을 이미 추상화시키는 과정을 거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과정이 어떤 전형적인 클리셰로 퍼져있는 것이다. 어릴 적 그렸던 크레파스 그림은 언제나 스케치는 즐겁고, 색칠은  어려웠다. 정말 색칠공부 시간은 빈칸 채우기 시간과도 같았다. 실재해있는 것을 도통 같이 그리기는 불가능 해보였지만, 느낀 그대로 그리는 것은 즐겁고 신나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호크니는 단순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문제인 그림에 대한 태도에 대해 지적한다. 나는 보통 인물을 그릴 때 굵은 선을 곧잘 쓰곤 하는데, 이것은 선이기도 하면서 면이기도 하다. 어쩌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적당한 타협인 것이다. 미술교육으로 세뇌당해본 적 없는 내게도 면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평면 안에 생각과 감정을 녹여내는 것, 호크니의 말은 회화의 위대함을 되묻는 것 같이 들리기도 한다.


호크니의 회화에 대한 예찬은 본인의 오판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그림이라는 형태를 경배하는데 숨김이 없었고, 그것을 위하는,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있어서도 그만큼 신중하고 열정을 다 할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회화를 위한 연구욕심도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타 문명의 고전회화들을 공부했고 그것을 실제로 자신의 작업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이집트의 회화를 통해 기존의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는 ‘세계를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측정하는 것은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문을 열고, 그의 생각을 내비친다. 기하학적 시각이라는 것은 이성적,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를 상징한다. 관념적으로 우리는 소실점이라는 것을 만들고 원근법을 이해한다. 이 과정은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교육에 따른 이해일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우리에게 ‘생각의 표현'을 제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피카소의 회화를 정말로 좋아한다. 그의 그림은 입체주의를 통한 예술적 성취를 차치하고, 무한한 영감을 주는 재료이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언정, 그가 그려낸 세상은 그 무엇과도 같지 않다. 사회적인 통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시각을 믿은 것이다. 그러한 그의 재기발랄한 용기가 부럽다. 공교롭게도 호크니 역시 피카소를 존경하고 그것을 드러냄에 있어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이집트의 회화 이야길하면서 ‘눈을 마음의 일부' 라고 언급했다. 그 역시 자신의 시각과 판단에 대한 믿음이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닌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고흐 습작, 중국회화 연구 등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결국 동양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역원근법을 통해 풍경에 대한 시각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그는 또한 ‘음탕한 눈'이라는 용어를 통해, 일상에서 미적 쾌락을 느끼는 것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무언가를 강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올해에 들어 작업하는 본인의 작업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화 작업 뿐 아니라, 평소 핸드폰 카메라를 통해 시각적인 미를 기록하곤 한다. 작업이라고 말하긴 조금 부끄럽고 해서 sns를 통해 친구들에게 공유하는 편이다.(어찌보면 호크니의 아이폰 그림 행위와도 유사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호크니의 아이폰 그림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다. 정확하게는 그 행위가 주목받는 것에 대해서.) 뚜렷한 개념이나 목적이 있어 사진을 촬영한다기보다, 일상에 있어서 시각적으로 묘한 매력이 있거나, 비논리적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미적인 것 때문에 기록하고 보여주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관객(친구)들은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곤한다. ‘그래서 이 사진의 의미가 뭔데?’ 작품이라는 것은 그 안에 메세지나 의도가 있기도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 과정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호크니에게 그림이 일상적이고 습관적이듯, 내게는 사진촬영이 그러하다. 본인에겐 앞서 언급했듯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가 그리 일상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호크니는 그러할 것이다.), 그보다 더 직관적이고, 덜 메세지가 담긴 행위인 ‘사진촬영 & 바로공유'를 통해서 직관적인 미적 쾌락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인이 호크니만큼 유명하거나 예술적 성취를 이룬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렇게 이해해주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고 본다. 어찌 됐건 그의 일상에서 미적 쾌락을 찾는 습관은 굉장히 긍정적인 요소라고 해두고 싶다. 꼭 본인이 비슷한 행위를 해서 가 아니라, 삶과 예술을 일치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한 작업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다소 아슬아슬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 “회화는 나이가 든 사람의 예술이다.” 삶의 경험과 세상을 그리고 바라보는 경험이 나이가 듦에 따라 쌓인다는 뜻입니다.’ 아슬아슬하다고 말한 이유는 그 말을 한 호크니 스스로가 생의 말년에 닿은 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도 이 명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회화는 그 어떤 작업보다 솔직한 내면의 투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고, 본인 스스로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또 왜 그려야만 하는 지에 대한 이유는 삶을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동기들과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가장 두렵고 힘들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텍스트와 말솜씨로는 자신의 작업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가 없어서 라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은 그 상황이 너무도 답답하고 억울해서 눈물을 터뜨리기 까지 했다 한다. 이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이 그림을 그려야하는 이유, 당위 그리고 그림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어쩌면 모르는 채 알려 노력하는 것이 진정 좋은 작업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일지도 모른다.) 살아가며 접하는 경험, 신화, 철학, 문학, 역사, 인문, 사회의 여러 모습들이 자신의 작업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소재가 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끌어와 작업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노화를 겪는 인간임에 틀림이 없고, 그렇기에 호크니가 회화를 노년의 영광으로 돌린 이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는 후기 스타일이 진정한 예술가의 작업의 방향 인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으나,(본인도 그것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나는 나이가 들어야 비로소 이 작품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경험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것에 본인의 주장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아직도 호크니를 그리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최근 다녀온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거대한 크기의 그림에서도 큰 감명을 얻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회화적이었던 미국 이주 초기의 알 수 없는 고독함이 느껴지는 작업들을 좋아한다. 형식적인 측면 외에도 충분히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에 대한 오해는 많이 씻어낼 수 있었다. 그는 매우 노력하고 공부하는 작가이고, 손쉽게 최고의 화가 자리를 갖게 된 것이 아니었다. 회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만으로도 충분히 공부하고 배울 점이 많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시간이 흐른 뒤, 호크니의 그림이 지금과는 다르게 보이길 기대하며 글을 줄이도록 하겠다. 왜인지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그 때가 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