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월 20

오후 5시


 중학교 때 학원에서 학업성취도에 대한 테스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망해버려서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학원이지만, 당시에는 대교(눈높이)와 협약도 체결하는 등 꽤 잘나갔던 곳이었다. 그곳에 다니는 것만으로 선진교육을 받는다는 안심을 하게 하기도 했다. 당시에 듣던 "서울애들은 이건 기본이다.","걔들은 지금 안잔다."등의 말들은 이중적으로 우릴 더 옥죄었다. 나는 그 학원에서 가장 상급반에 위치해있었다. 본래 이름은 '명예'반이었는데, 후에 하이코스 반으로 개명되었다. 가장 상급반이 명예라니? 아직까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명예, 지혜, 진리, 용기 뭐 이런 순 이었던 것 같은데, 이름이 각 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나는 진리와 용기가 최고의 학생들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명명법에도 어떤 동양적 사고 방식이 작용하는 듯 하다. 명예라니. 누구의 명예를 찾아준다는 말인가?

 우옛든동 학업성취도 테스트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그 테스트를 매우 재밌게 치루었다. 어릴 적부터 각종 심리테스트 등을 통해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조금 더 멀리 보는(단순한 질문 속에서) 상황을 즐겼다. 한 달 쯤 후, 집으로 연락이 왔나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 결과가 부끄러웠다기 보다 선생님의 말씀이 날 부끄럽게 했다. 어머니를 통해 들은거라 조금 더 걱정스러운 뉘앙스로 변하긴 했겠지만...... . 요는 내가 상급반에 있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개인적인 성취감에 따라 공부의 동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칭찬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보통의 공부를 잘하는 또래들과는 다른 결과라 걱정이 된다 내지는 더 올라가기 위해서는 한계가 존재한다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보통 다 그렇지 않나?'하는 의구심과 함께 다른 친구들이 보통의 수업시간에 성취감따위를 어떻게 느낄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그 학원은 중학생을 아침9시부터 밤11시 넘도록 잡아놓는 식의 상당한 집중력을 요했기 때문이다. 선진교육법을 자랑했지만 결국에 중요한 것은 학습량이라는 것을 인정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 즐거움이라고는 쉬는 시간에 잠깐 하는 잡담과, 한시간도 안되는 점심시간에 사먹는 라면(매정한 주인아줌마는 컵라면외에 뜨거운 물값을 100원씩 받아먹었다.)뿐이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후부터 선생님들이 내게 보이는 호의가 진실로 보이지 않았다. 본래 그 상급반에서 턱걸이 수준으로 버티고 있었기도 했다. 스스로 그 반에 속해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수학과 과학 시간은 순.수.히. 자율적 몽상시간이었다. 결국에 내가 가졌던 칭찬이 공부의 동기가 되는 알고리즘을 철저하게 배격하게 되었다. 내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하게 된 것이다. 내 행동의 동기는 전혀 순수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고 말이다.

 오늘 다큐멘터리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보았다. '동양인들은 남들과의 사회적관계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정하고 그에 따라 공부를 하게된다.' 텍사스 주립대에서 실험이 있었다. 창의력 문제를 내주고, 후에 대상자에게 거짓으로 점수를 알려준다. 그리고 다른 문제를 내주곤 굳이 풀 필요는 없다면서 자리를 비운다. 그것의 결과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서양인의 경우, 대상자의 결과가 평균보다 높다라고 얘길 해주면 남은 문제에 더욱 큰 의욕과 재미를 느끼고 풀게 된다고 한다. 칭찬이 동기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평균보다 점수가 낮다고 얘기했을 시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반면에 동양인들은 평균보다 점수가 낮다고 얘기해줄 때에는 불안감과 수치감, 그리고 자존감에 입은 상처등으로 동기가 생겨 남은 문제들을 푼다. 하지만 평균보다 점수가 높다고 얘기해주었을 시에는 이내 흥미를 잃게 된다. 자신의 위치를 위해 더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실험은 서울대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결과는 비슷했다. 방송이라 정확한 통계수치는 알 수 없었으나, 앞서 텍사스에서 진행된 실험은 유의미한 결과를 드러내는 도표가 공개되었다.

 나는 현재까지를 포함하는 과거의 나를 전혀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내가 속한 그룹에 비정상적으로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칭찬과 인정에서 동기를 찾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고정된 지위와 위치보다는 다소 결핍되고 불안한 현재에서 진실성이 나타난다. 하고싶은 것에 칭찬받고 내가 온 마음을 다해 무엇을 하고싶은 것인지 알아가는 것은 그 어떤 기준보다 중요하다. 기준은 단지 (버스터미널 내지는 공항)경유지같은 것이다. 색칠공부할 때, 광활한 흰 배경에 압도당해서 조금씩 선을 긋고 이까지만 칠하고 놀자고 생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큐에 따르면 이미 의미적인 부분에서 서양적 공부와 동양적 공부는 궤를 달리 한다. 우리가 여태껏 해온 많은 책을 읽고 머리에 집어 넣는 식의 행위는 동양적 공부에 해당한다. 예를 들자면 수능시험이나 과거시험같은 것들 말이다. 시대는 바뀌고 그 누구도 어떤 가치도 쉽게 폄하할 수 없게 되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이미 달라졌는데 새 시대에 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나간 가치를 강요한다. 공부는 암기로 하는데, 시대는 질문을 한다. 희생양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대학을 가고 직장엘 갔다가, 그때서야 솔직해진다. 아니, 솔직해질 수 밖에 없어진다. 자신의 동기가 되었던 사람은 죽거나, 기가 쇠해지고, 본인의 동기였던 어떤 기준은 해가 갈수록 잡을 수 없는 안개같은 것이 되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종종 내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다보면 쉽게 '그렇다면 왜 아직 안죽고 있는가?'로 귀결된다. 살아야할 당위성을 찾기 힘든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어떤 파편들(흔히 예술로 불리곤 한다.)에서 이것때문에 아직 살아있나? 하고 흔적을 찾게된다. 흔적. 누군가가 남겨놓은 흔적에서 나의 미래를 반추한다. 언젠가 너무나도 명확히 알아버리게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포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몇 해전,  노량진 1호선 역에 그런 말이 써있었다. "진리는 너무 밝아서 쉽게 눈을 뜨고 바라볼 수가 없다." 군대가기 전에 들었던 말이었는데 언젠가 우연히 보게되었다. 낡아서 다 벗겨진 페인트칠은 나를 조금 더 가렵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