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11월 14

한 세기 전의 사유

중국 도자기 공예품

 걸어가느냐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위를 날아가느냐에 따라 시골 길이 발휘하는 힘은 전혀 달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텍스트도 그것을 읽느냐 아니면 베껴 쓰느냐에 따라 발휘하는 힘이 전혀 다르다. 비행기로 여행하는 사람은 오직 길들이 풍경 속을 뚫고 나가는 모습만을 볼 뿐으로 그의 눈에 길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지세와 동일한 법칙에 따라 펼쳐진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길의 지배력을 알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는 그저 쭉 펼쳐져 있는 평야에 불과한 지형들로부터 마치 병사들을 전선에 배치하는 지휘관의 호령처럼 원경들, 전망대, 숲 속의 공터, 굽이굽이 길목마다 펼쳐진 멋진 조망을 불러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껴 쓴 텍스트만이 그것에 몰두한 사람의 영혼에게 호령할 수 있는 반면 단순한 독자는 [텍스트에 의해 열린] 자기 내면의 새로운 광경들, 계속 다시 빽빽해지는 내면의 원시림들 사이로 나 있는 길을 결코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저 읽기만 하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하늘을 떠돌며 자아의 움직임에 따르지만 베껴 적는 사람은 그러한 움직임에 호령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의 서적 필사 전통은 문예 문화에 있어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보증이었으며, 사본은 중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이다.


카이저 파노라마관

 독일 인플레이션 일주 여행

 I. 우매함과 비겁함이 하나로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독일 시민의 삶의 방식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예의 그 엄청난 표현 중에서도 임박한 파국에 관한 표현은 - "사태가 이대로 계속 진행되지는 않겠죠" - 특히 한번 자세히 고찰할 만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안전하다, 그래도 뭔가를 소유하고 있다라는 관념에 속수무책으로 매달려왔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현재 상황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매우 주목할 만한 안정성을 지각하지 못하고 있다. 전쟁[제1차세계대전] 전의 상대적 안정성이 유리했기 때문에 그는 가진 것을 빼앗는 상태는 모두 불안정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정적 상황이 쾌적한 상황일 필요는 결코 없으며, 심지어 이미 전쟁 전에도 안정적 상황이 안정적 비참함이었던 계층들이 있었다. 몰락은 결코 흥기보다 덜 안정적인 것도, 결코 흥기보다 더 놀라운 것도 아니다. 몰락이야말로 현재 상황의 유일한 도리라는 것을 과감하게 인정할 수 있다면 그러한 견해만이 날마다 반복되는 것에 놀라는 태도 - 이제 그렇게 놀라는 강도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 에서 벗어나 몰락 현상들을 안정 그 자체로 그리고 구원만을 이상한 것, 즉 기적에 가까운 불가사의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중부 유럽의 민족 공동체들은 마치 식료품도 탄약도 바닥나가고 있고 인간의 추론으로는 도저히 구원은 기대도 할 수 없는 포위된 도시의 주민들처럼 살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라면 항복을, 어쩌면 무조건 항복을 아주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중부 유럽이 자신에 맞서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있는 무언의 보이지 않는 힘은 교섭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남아 있는 것이라곤 최후의 돌격을 영구히 기다리면서 그래도 아직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는 뭔가 보통이 아닌 것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상태, 즉 주의력을 극도로 긴장시키고 불평 하나 없이 견디며 주목하고 있는 상태는, 우리를 포위 공격하고 있는 힘과 은밀히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기적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사태가 이대로 계속 진행되지는 않으리라는 기대는 어느 날 개인의 고통과 관련해서든 아니면 공동체의 고통과 관련해서든 그것을 넘어서 사태가 그렇게까지는 진행되니 않을 한계는 하나, 즉 섬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II. 기이한 역설. 사람들은 행동할 때는 극히 편협한 사적 이익만을 염두에 두지만 동시에 그러한 행동에 있어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대중적인 본능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 대중적인 본능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미쳐 돌아가고, 삶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다. 동물의 어두운 본능은 - 무수한 일화가 말해주고 있듯이 - 위험이 다가오면 보이지 않는 거서럼 보이는 탈출구를 찾아내는 반면 누구나 자기만의 저급한 안녕만 도모하고 있는 이 사회는 동물처럼 우둔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동물이 가진 희미한 직관은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맹목적인 대중으로서 온갖 위험, 바로 코앞에 닥쳐온 위험에조차 희생당하게 되며, 개인들의 목표의 다양성은 개인들을 규정하는 힘들의 동일성 앞에서는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사회는 익숙해진,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삶에 어찌나 완고하게 집착하는지 지성을 진정 인간에 걸맞은 방식으로 적용시킨 것, 즉 예견이 극히 긴박한 위험에 직면한 경우에조차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누차 입증되어온 바 있다. 그 결과 이 사회에서 우둔함은 극한에 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삶에 중요한 본능에 대한 확신의 결여, 더구나 그것의 도착과 무력감. 아니 지성의 몰락. 이것이 바로 독일 시민 전체의 상태이다.

 III. 친밀한 모든 인간관계는 거의 견디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침투력을 가진 투명함에 의해 통과당하게 되면 거의 존속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돈이 파괴적인 방식으로 모든 핵심적인 이해의 중심에 자리 잡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것이, 그것을 넘어서면 거의 모든 인간적 관계가 허용되지 않는 경계선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적인 본성의 영역에서나 도덕의 영역에서도 소박한 신뢰, 차분함, 그리고 건전함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IV. 흔히 '적나라한' 빈곤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거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 - 그것은 궁핍의 법칙하에서 관습이 되기 시작하며, 감추어진 고통의 천 분의 일밖에는 보여주지 않는다 - 과 관련해 가장 유해한 것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동정심이나 그와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다행히 나는 아니다'라는 의식이 아니라 그의 수치심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불편한 헐벗은 몸을 가리게 하려고 지폐를 던져주면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돈으로 생활해나가는 독일의 대도시는 살만한 곳이 못 된다.

 V.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세상은 가난한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든다. 그렇게 만들면서 알량한 금언으로 그들을 위로한다. 이 금언은 과거에 한때 통용되다가 이미 오래전에 변질되어버린 금언 중의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잔혹한 금언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일하는 자를 먹여 살리는 노동이 존재했을 때는 그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은 가난도 있었다. 흉작 등의 불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가 그러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태어나면서부터 굶주리게 만들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점점 더 가난 속으로 옭아매고 있는 현재의 빈곤화는 사람들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다. 불결함과 비참함이 보이지 않는 손들에 의해 만들어진 벽처럼 그들 주위에 높이 쌓아 올려지고 있다. 인간은 혼자서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아내가 남편이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보거나 아내 자신도 당하고 있다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듯이 개인도 자기 혼자라면 견딜 수 있는 한 최대한 견디며 감출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감추려 한다. 하지만 가난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자신이 속한 민족과 자기 집 위를 뒤덮어버린다면 아무도 그러한 가난과는 결코 화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는 오감을 그에게 가해지는 모든 굴욕에 항상 깨어 있도록 하고, 고통이 원한의 급격한 내리막길이 아니라 반역의 오르막길을 개척할 수 있을 때가지 오감을 엄격하게 단련해야 한다. 하지만 극히 무시무시하고 암울한 온갖 운명이 날마다, 아니 시시각각 저널리즘에 의해 논의되면서 온갖 거짓 원인과 거짓 결과만이 제시되기 때문에 아무도 삶을 속박하고 있는 어두운 힘들을 인식할 수 없는 한 이곳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희망은 거의 없다.

 VI. 독일인들의 삶의 양식을 겉으로만 관찰하는 외국인이나 이 나라를 단기간 여행한 외국인의 눈에는 이 나라 주민들이 어딘가 이국적인 인종 못지않게 기이하게 비칠 것이다. 재기 넘치는 한 프랑스인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는 독일인은 극히 드물다. 설령 알게 되더라도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설령 입 밖에 냈다 하더라도 이해받기는 힘들 것이다." 이처럼 씁쓸한 차이를 전쟁이 한층 더 크게 벌려놓았는데, 단순히 실제 있었던 일이든 전설 속 이야기이든 독일인이 행했다고 보도된 파렴치한 행위 때문에만 그렇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유럽인들의 눈으로 볼 때 독일의 기이한 고립을 비로소 완성시킨 것, 즉 실로 다른 유럽인들로 하여금 독일인들을 보면 마치 호텐토트족(이것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다)과 만나는 듯한 태도를 갖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국외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안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전혀 의식할 수 없는 폭력, 즉 마치 미개인들의 삶이 부족의 규범에 얽매여 있듯이 이곳의 삶의 방황, 비참함과 우매함이 이[독일이라는]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집단[공동체]의 힘에 예속시킬 때의 폭력이다. 인간의 모든 성취 중 가장 유럽적인 부, 즉 정도 차는 있겠지만 저 명료한 아이러니, 즉 개인이 어떤 공동체에 속하더라도 공동체의 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이러니는 독일인들에게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VII.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이전에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방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당연했으나 지금은 상대방의 구두나 우산 값을 물어보는 것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사교상의 어떠한 이야깃거리에도 삶의 상황에 관한 테마, 돈이라는 테마가 어김없이 침입해 들어온다. 이때 화제에 오르는 것은 저마다의 걱정거리와 고민 - 그렇더라면 서로 도움이 되어줄 수도 있겠지만 - 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어떻게 보는가이다. 마치 극장 안에 갇혀서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무대 위의 공연을 계속해서 봐야만 하고,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반복해서 사고와 이야기의 주제로 삼아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VIII. 어떻게든 몰락이 감지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은 지체 없이 자신이 그러한 혼돈 속에 머무르며, 활동하고 게다가 관여하고 있는 것에 대한 특수한 방식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태도로 이행하게 될 것이다. 이어 전반적인 실패에 관한 실로 많은 통찰만큼이나 본인의 활동 범위, 주거지와 현황에 관해 그만큼의 많은 예외를 인정하려 한다. 개인적 실존이 무기력하기 짝이 없고 또 온갖 얽매임에 휘말려 들어가 있는 상태에 초연한 태도로 대처함으로써 최소한 이 실존을 사방에 만연해 있는 현혹이라는 배경으로부터 빼내려는 생각조차 없이 그저 그러한 실존의 위신을 구하려는 맹목적 의지만이 거의 모든 부분에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공기가 온갖 '삶의 이론'과 '세계관'으로 가득 차 있고, 이 나라에서 그러한 것들이 그토록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이 거의 언제나 무언가 하찮기 그지 없는 사적인 상황을 재가해주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와 똑같은 이유에서 만난에 굴하지 않고 문화적 미래가 하룻밤 사이에 만개한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날 것이라는 환상과 신기루가 세상에 넘쳐나고 있는데, 누구나 자신의 고립된 입장이 만들어낸 착시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XI. 이 나라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인간다운 인격의 윤곽을 포착할 수 있는 시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들 눈에 모든 자유인은 기인처럼 보인다. 고지 알프스 산계를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단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검은색 천의 주름들 뒤로 비친 모습을. 강력한 형태들도 아주 흐릿하게 보일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무거운 커튼이 독일의 하늘 앞을 가로막고 있어 심지어 가장 위대한 사람들의 윤곽들조차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X. 사물들에서 온기가 사라져가고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물건들이 인간을 가만히, 그러나 단호히 뿌리치고 있다. 요컨대 매일 물건들이 나타내는 은밀한 저항 - 공공연한 저항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엄청난 양의 노동을 하고 있다. 그것들을 만지는 손가락 끝이 마비되지 않도록 차가운 냉기를 몸의 온기로 상쇄시켜야만 하며, 물건들에 찔려서 피가 나는 일이 없도록 그것들이 갖고 있는 가시를 극히 요령 있게 다루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도움도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차장, 공무원, 직공들, 점원 - 이들은 모두 반항적인 물질세계의 대변자라는 자각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세계의 위험성을 무뚝뚝함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내려고 기를 쓴다. 그리고 심지어 국토조차 이러한 사물의 퇴폐화 - 사물들은 이러한 퇴폐화를 통해 인간을 몰락시킴으로써 인류를 벌하고 있다 - 와 결탁하고 있다. 사물과 마찬가지로 국토도 우리를 갉아먹고 있으며, 독일의 봄이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 것은 붕괴 중인 독일의 자연의 수없이 많은 연관 현상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러한 자연 속에서 사람들은 마치 모든 사람이 지탱하고 있는 공기주의 무게가 갑자기 모든 법칙에 반해 이 나라 전역에서 체감 가능하게 된 것처럼 살고 있다.

 XI. 인간의 모든 운동 - 정신적인 충동에서 유래하는 것이든 아니면 자연적[본성적] 충동에서 유래하는 것이든 상관이 없다 - 의 전개에 대해 환경이 무제한으로 저항할 것이라는 통고가 전해졌다. 주택난과 교통비 상승이 심지어는 중세 이후 이런 저런 형태로 존재해왔던 유럽적 자유의 기본적 상징들, 예를 들어 주거의 자유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있다. 그리고 중세적 강제가 인간을 온갖 자연적 집단에 묶어놓았다면 오늘날의 인간은 비자연적인 공동성에 쇠사슬로 묶여 있다. 주거의 자유에 대한 압박만큼 지금 사방에 만연하고 있는 방랑욕이라는 불길한 힘을 강화시켜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주의 자유가 풍부한 이동 수단과 이토록 커다란 불균형을 이룬 적도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XII. 모든 사물이 부단히 뒤섞이고 오염되는 과정에서 본질적 특징을 잃고 애매한 것이 고유한 것을 대체하듯이 도시도 마찬가지이다. 대도시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비할데 없는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으로 안에서 사물을 창조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성 안의 평화 속에 가두어버리며, 또한 지평선의 출현과 함께 점점 더 각성되어가는 근원적 힘[자연력]도 의식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대도시가 사방에서 침입해 들어오고 있는 전원에 의해 벽이 뚫리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풍경이 아니라 야외의 자연이 가진 가장 가혹한 것, 즉 경작지, 국도, [가로등이나 네온으로] 빨갛게 떨리는 공기층으로는 더이상 덮이지 않는 밤하늘에 의해서 말이다. 심지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구역에서조차 느껴지는 불안정이 도시 주민들을 불투명하고 극도로 소름 돋게 만드는 상황, 쓸쓸한 평지에 있는 온갖 불쾌한 것들 사이에서 도시의 건축 구조상 유산된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철저히 밀어 넣어버렸다.

 XIII. 부와 빈곤의 영역에 대한 고귀한 무관심이 제조된 물건들로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물건은 소유자에게 상표를 붙이며, 소유자에게는 가난한 자로 보일지 아니면 악덕 상인으로 보일지 둘 중의 하나의 선택밖에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진짜 사치는 정신과 사교성이 거기에 침투하면 그것이 사치품이라는 것이 잊혀지도록 하는 것인 반면 지금 우리 눈앞에서 한창 뻐기고 있는 사치품들은 어찌나 뻔뻔하게 견고함을 과시하는지 그것과 부딪히면 어떠한 정신의 광휘도 부서져 산산조각 날 것이기 때문이다.

 XIV. 여러 민족들의 최고의 관습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 같은 것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너무나 풍부하게 받고 있는 것을 받을 때는 욕심부리는 행동은 삼가도록 주의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 어머니 대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받을 때는 마땅히 우리가 매일 받는 것 중에서 일부를 우리 몫을 취하기 전에 먼저 대지에 반환함으로써 경외의 마음을 표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경외의 마음은 신에게 술을 바치는 오랜 관습에 나타나 있다. 아니, 어쩌면 땅에 떨어진 벼이삭이나 포도를 주워 담아서는 안 된다는 계율 속에서조차 이 태곳적의 규범적인 경험이 변형된 채로 보존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이 대지나 축복을 베풀어준 조상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의 관습에서는 식사 때 빵 부스러기를 줍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 그것은 반신의 것이라는 이유에서. 사회가 곤궁과 탐욕 때문에 어찌나 퇴폐해가고 있는지 자연의 은혜를 강탈하듯이 해서만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가격이 유리할 때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아직 충분히 익지도 않은 과일을 따며,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접시의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이 사회의 토양은 척박해지고 토지는 흉작을 초래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 1923년 독일 여행 후